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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들의 무림 · 03편

묘 지문 — 사람 같은 무언가의 도움이 필요해

1편에서 적었듯이 육성한 캐릭터는 세계로 들어가 한 사람의 일생을 살고, 언젠가 죽어 묘가 세워진다. 이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육성한 캐릭터를 각인, 세계가 스스로 만든 인물을 무명이라고 부른다. 둘은 세계 안에서 똑같이 살고 똑같이 죽는다.

다만 각인의 묘에는 게시물이 하나 붙고, 거기에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적은 글이 새겨진다. 그게 묘 지문이다.

묘는 기획 초안 첫 판부터 있던 요소다(2편). 그때 적은 것은 "죽으면 생애 기록과 만든 사람이 함께 남는 게시글"까지였다. 그 생애 기록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울지가 이번 편의 이야기다.

이 게임을 다시 열 이유를 꼽으면 둘이다. 지켜보는 동안의 재미, 그리고 묘다. 몇 달을 지켜본 인물의 마지막 글이니 묘 지문이 흥미롭기를 바랐다.

규칙으로 쓰면 다 같은 꼴이 된다

처음 묘 지문은 규칙으로 지었다. 일생의 사건 가운데 그 사람을 남과 구별하는 일을 골라 사람별로 묶고, 정해진 틀에 채운다. 사실은 정확하다. 이름도, 횟수도, 해도 틀리지 않는다.

명절에 공동 묘원을 방문해 묘 뒷면을 살펴보면 대부분 비슷비슷한 내용뿐이다. 하지만 이 게임의 묘 지문은 저마다 특별한 인생을 살았음을 이야기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관하범
안원 17년 ~ 명순 5년 · 향년 37
청도 사람 · 무인

  화청 원~7년 — 아이 셋을 두었다

  옹초라 · 주단란 · 최백인 — 스승으로 모셨다
  마연혜 — 4년에 걸쳐 남몰래 만났다
  상관진기 — 2년에 걸쳐 남몰래 만났다 · 의형제를 맺었다
  맹준호 · 용옥단 — 의형제를 맺었다
  왕은연 — 3년에 걸쳐 눈을 피해 만났다

명순 5년 8월 8일, 역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추호표
안원 17년 ~ 명순 5년 · 향년 37
백부 사람 · 평민

  화청 4~7년 — 아이 둘을 두었다

  방주정 — 백년가약을 맺었다
  탁홍정 · 채아희 — 의형제를 맺었다
  왕성용 — 가르쳤다
  남백범 — 원수가 되었다
  왕라유 — 눈을 피해 만났다

명순 5년 9월 7일, 역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결과를 읽어 보면 무인과 평민의 삶이 구별되지 않는다. 둘 다 같은 해에 태어나 스승을 모시고, 의형제를 맺고, 아이를 두고, 남몰래 만나다가 같은 해 역병으로 죽었다. 40장 가운데 17장이 "명순 5년 … 역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로 끝났다.

규칙이 틀린 것은 아니다. 배움과 혼인과 의형제와 밀회는 이 세계에서 누구나 겪는 일이고, 역병이 돌면 여럿이 한 해에 함께 죽는다. 사실만 늘어놓으면 사람이 달라도 비슷한 윤곽이 나온다.

게다가 틀이 하나라서 목록의 모양까지 같다. 몇 달을 지켜본 캐릭터의 마지막 글이 옆 묘와 똑같다면, 그 묘를 열어 볼 이유가 없다.

사람 같은 무언가(AI)가 필요하다

사람이 검수했다면 절대 그대로 읽으라고 내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묘 지문의 문장을 사람 같은 무언가, LLM에게 맡겼다. 맡긴 것은 문장뿐이다. 누구와 무엇을 몇 번, 어느 해에 했는지는 세계가 정한 재료로 넘기고, LLM은 그것을 글로 엮는다.

재료에 없는 이름이나 횟수를 쓰면 검사기가 걸러 싣지 않고, 묘에는 대신 "아직 새겨지지 않았다"가 뜬다. 지어낸 과거를 새기느니 비워 둔다.

첫 윤문도 닮음꼴이었다

처음 쓴 지시는 "한 해에 한 줄씩 늘어놓지 말고, 이어지는 일은 한 문장으로 엮어라"였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전혀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무엇을 먼저 쓸지를 더 다듬고 표현도 압축해야 했다. 아래는 지시문의 일부다.

  • 이 사람의 삶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먼저 정한다. 되풀이된 일, 오래 얽힌 사람, 맺었다가 깨진 사이가 그 모양을 정한다.
  • 본문 첫 문장은 그 모양을 말한다. "여러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처럼 누구의 묘에나 설 수 있는 말은 쓰지 않는다.
  • 그다음은 갈래로 묶는다. 모든 문장을 해로 시작하지 않는다.
  • 다 쓰지 않아도 된다. 한 번뿐인 잔일은 사람을 모아 한 줄로 줄이거나 뺀다.

윤문 전과 후

지시를 바꿔 같은 두 사람의 재료를 다시 보냈다. 둘 다 검사를 통과했다. 목록형은 인연을 여덟 사람에서 자르고 LLM은 재료 전부를 받기 때문에, 관하범의 글에는 목록에 없던 이름이 더 나온다.

관하범
안원 17년 ~ 명순 5년 · 향년 37
청도 사람 · 무인

상관진기와는 남몰래 여섯 번 만나며 안원 37년에 의형제를 맺었다.
마연혜와 다섯 번 남몰래 만나던 화청 원년에는 송화연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화청 7년까지 세 아이를 두었다.

옹초라를 시작으로 여러 스승을 모셨으며, 곽웅풍과 송경백 두 사람을 가르쳤다.
서인기와 송건천을 비롯한 여럿과도 의형제를 맺어 인연을 넓혔다.

화청 11년 이후에는 연숙앵과 왕은연, 남연경을 눈을 피해 만났다.
명순 5년에는 설태현과 원수가 되었다.

명순 5년, 역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추호표
안원 17년 ~ 명순 5년 · 향년 37
백부 사람 · 평민

방주정과 백년가약을 맺은 사람이다.
안원 36년에는 탁홍정과 의형제를 맺었고, 안원 38년에는 채아희와도 의형제를 맺었다.
그 사이 안원 37년에는 왕성용을 가르쳤다.

화청 4년부터 화청 7년 사이에 두 자식을 두었다.

명순 4년에 남백범과 원수가 되었다.
명순 5년에는 왕라유와 눈을 피해 두 번 만났다.

명순 5년, 역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달라진 것은 셋이다.

  • 첫 문장이 그 사람의 것이다. 관하범은 "상관진기와는 남몰래 여섯 번 만나며 안원 37년에 의형제를 맺었다"로 시작한다. 목록에서는 한 줄에 점으로 나란히 있던 두 일이, 이 사람을 소개하는 첫 문장이 됐다.
  • 일이 엮인다. "마연혜와 다섯 번 남몰래 만나던 화청 원년에는 송화연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목록에서는 서로 다른 줄에 흩어져 있던 두 일이 한 문장 안에서 겹친다. 없는 인과는 붙이지 않았다. 재료에 두 일이 같은 해에 걸쳐 있을 뿐이다.
  • 잔일이 줄어든다. 스승과 의형제를 하나하나 다 부르지 않고 "옹초라를 시작으로 여러 스승을", "서인기와 송건천을 비롯한 여럿과도"로 줄였다. 그래서 정말 얽혔던 사람이 앞에 선다.

정리하고 보니 이 세계에는 불륜이 너무 일상인 것 같다. 이거 문제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요약 세 줄

  • 규칙으로 지은 지문은 사실은 정확하지만, 세계가 모두에게 비슷한 일을 주니 사람이 달라도 같은 글이 된다. 40장 중 17장이 같은 해 같은 역병으로 끝났다.
  • 사실은 세계가 들고 문장만 LLM에게 맡긴다. 첫 윤문은 매끄러운 연대기였지만, "삶의 모양을 먼저 정하고 첫 문장에 그 사람만의 사실을 쓰라"로 지시를 바꾸자 글이 사람마다 차별화됐다.
  • 일이 적은 삶은 아직 목록에 가깝고, 사실과 이야기 사이의 줄다리기는 남아 있다.

공동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