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좌들의 무림 · 05편
사연 — 시스템이 캐릭터를 섭외하는 연극
4편에서 싸움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로그를 한참 읽다 보니 다른 게 걸렸다. 사건들이 맥락 없이 났다. 오늘 누군가 비급을 줍고, 모레 누군가 시비가 붙고, 한 달 뒤 누군가 원수가 된다. 하나하나는 그럴듯한데 서로 이어지지 않으니, 흘러가는 로그가 굉장히 무의미해 보였다.
이어지지 않는 사건들
세어 보니 세 가지가 같은 곳을 가리켰다.
- 닫힌 고리는 스스로 시작하지 못한다. 원한이 비무를 낳고, 비무에서 진 사람이 다시 원한을 품는 고리가 있었다. 그런데 처음 원한을 만드는 사람이 없으면 고리는 영영 돌지 않는다. 4편에서 "시비가 원한을 낳는다"를 넣었는데 숫자가 하나도 안 움직인 것이 그 모습이다.
- 절반 가까운 사건이 거의 안 났다. 중요한 사건 24종 가운데 11종이 한 해에 한 건도 안 났고, 둘은 33년 동안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확률만 올리면 이번에는 그 사건이 판을 덮는다.
- 인과가 두 단계에서 끊겼다. "무엇 때문에 무엇이 났다"가 기록된 사건을 모아 보니 가장 긴 사슬이 두 마디였다. 긴 이야기는 사건을 이어 붙이는 것만으로는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사건 위에 틀을 하나 더 얹었다. 이 게임에서는 그것을 사연이라고 부른다.
시스템이 섭외하고, 캐릭터가 연기한다
사연은 연극에 가깝다. 시스템이 대본의 뼈대를 들고 세계에서 배우를 섭외하고, 섭외된 사람들은 배역에 맞춰 움직인다.
- 섭외
배역마다 조건을 걸고 세계에서 사람을 뽑는다
못 채우면 그 사연은 걸지 않는다 - 마디
정해진 순서로 사건을 부른다
마디마다 판정을 굴린다 - 꺾임
판정이 어긋나거나 배역이 죽으면 꺾인다
꺾이는 것도 이야기다
- 배역은 조건으로 뽑고, 뽑으면 바뀌지 않는다. 나이, 성별, 문파, 직업, 사는 곳, 서로의 관계 같은 조건을 건다. 조건에 맞는 사람이 없으면 그 사연은 걸리지 않는다. 조건을 낮춰서 억지로 채우면 어느 세계에서나 같은 이야기가 돌고, 세계가 무대 장치가 되어 버린다.
- 마디는 이미 있는 사건을 부른다. 사연을 위해 새 사건을 만들지 않는다. 비급 습득, 시비, 원한, 비무, 결별처럼 세계에 이미 있는 사건을 정해진 차례로 부를 뿐이다.
- 결말은 정해져 있지 않다. 마디마다 판정을 굴리고, 어긋나면 이야기가 꺾인다. 복수하러 갔다가 지는 것도, 사랑이 들켜 원수가 되는 것도 이야기다. 결말을 정해 두면 그때는 정말 대본이 되었을 것이다.
- 각인이라고 더 챙기지 않는다. 배역은 무명에게도 똑같이 간다. 각인에게만 이야기가 생기면 그건 우대이고, "모든 캐릭터는 세계 안에서 똑같이 산다"는 원칙이 깨진다.
무협지에서 흔히 보던 열한 편
첫 대본은 무협지와 무협 웹툰에서 흔히 보던 플롯으로 채웠다. 싸움과 애정과 흑막이 고르게 들어가도록 열한 편을 골랐다.
| 사연 | 소재 | 흐름 |
|---|---|---|
| 사문비급의 의혹 | 흑막 | 비급 습득 → 시비 → 원한 → 결별 |
| 원수의 자식들 | 애정 | 만남 → 연모 → 밀회 → 발각 → 결속 |
| 벽을 넘기 위한 집착 | 싸움 | 시비 → 비무 → 다시 시비 → 다시 비무 → 또 시비 → 또 비무 → 사사 |
| 파계의 연 | 애정 | 교류 → 연모 → 밀회 → 발각 → 결속 |
| 명문 문파의 위선 | 흑막 | 청탁 → 대리 시비 → 부상 → 원한 → 유랑 |
| 사형의 그늘 | 싸움 | (계승이 나면) 시비 → 비무 → 결별 → 유랑 |
| 대상인의 청탁과 암투 | 흑막 | 청탁 → 대리 시비 → 부상 → 원한 |
| 객의 가르침과 질투 | 싸움 | 사사 → 시비 → 비무 → 유랑 |
| 망향의 유민과 인연 | 애정 | 만남 → 교류 → 연모 → 결속 |
| 재건 속의 암투 | 흑막 | 압박 → 대리 시비 → 부상 → 원한 → 유랑 |
| 복수의 순환 | 싸움 | (원한이 생기면) 비급 습득 → 유랑 → 비무 → 결별 |
이 열한 편은 첫 대본이다. 써 보니 대본에서 지워야 할 것이 먼저 보였다. "벽을 넘기 위한 집착"의 첫 초안에는 비무 뒤에 깨달음과 중상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둘 다 비무를 하면 세계가 이미 알아서 내는 것이었다.
지우고 나니 마디가 둘만 남아 너무 짧았다. 뒤를 늘리는 대신 가운데를 늘렸다. 시비 → 비무 → 다시 시비 → 다시 비무 → 또 시비 → 또 비무 → 스승으로 모신다.
그제야 제목에 걸맞게 됐다. 한 번 지고 마는 것은 집착이 아니다. 두 번, 세 번 지고 나서 그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는 결말까지 이어져야 집착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대본은 있는데 배우가 없었다
처음 돌렸을 때는 열한 편 중 여섯만 옮길 수 있었다. 틀이 모자란 게 아니라 섭외하는 쪽이 모자랐다. 핏줄을 조건으로 못 걸었고, 세계에서 이미 난 일을 보고 시작하는 사연도 걸 수 없었다.
- 원한을 조건으로 건 두 편은 걸릴 수가 없었다. "원수의 자식들"과 "복수의 순환"은 원한을 품은 사람이 있어야 섭외가 된다. 그런데 당시 세계에는 원한을 품은 사람이 한 명이었다. 4편에서 관계가 나빠질 수 있게 된 뒤에야 이 두 편이 살아났다.
- 세계에서 난 큰일이 아무 이야기도 낳지 않았다. 난리가 나고 역병이 돌아도 로그에 한 줄 뜨고 잦아들 뿐이었다. 그래서 "받는" 사연을 세웠다. 세계에서 난 일을 보고, 그 일이 난 지역에서 배역을 뽑아 시작한다.
- 이야기가 너무 드물었다. 대본을 스물한 편으로 늘리고 거는 빈도를 세 배로 올렸다. 둘을 함께 올려야 했다. 빈도만 올리면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되고, 종류만 늘리면 전체 양이 그대로다. 그러자 각인이 이야기에 드는 간격이 실시간 9.2일에서 2.6일로 줄었다.
- "이름 없는 자"로 뽑힌 사람이 최강자였다. "이름 없는 자가 이름난 자에게 도전한다"는 사연이 있는데, 세계에 명성이라는 값이 없어서 "이름난 자"를 "문파에 든 사람"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가장 센 사람이 문파가 없었다. 가장 센 사람이 "이름 없는 자" 역에 섭외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명성은 모두가 보는 겨룸의 자리에 선 적이 있느냐로 잰다.
흑막
흑막은 최근에 요청한 것이다. 흑막과 영웅은 무협 소설의 필수 요소다. 세계를 이끌어 가는 인물들을 노린 음모가 사연으로 생겨, 연대기에 잘 담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본에는 이미 흑막 소재가 있었다. 그런데 연대기에는 한 줄도 뜨지 않았다. 전부 사사로운 일(1:1 비무, 원한, 발각)이라 강호의 큰일을 싣는 연대기에 오를 자격이 없었다. 음모가 그것들과 다른 점은 하나, 주요 인물을 노린다는 것이다.
| 사연 | 등장 인물 | 흐름 |
|---|---|---|
| 천하오절 암습 | 흑막(겨룸에 나가 보고도 다섯에 못 든 자) · 하수인 · 표적(천하오절) · 제보자 | 담소 → 유랑 → 암습 → 발각 → 원한 → 결판 → 진 쪽이 떠난다 |
| 찬탈 | 흑막(같은 문파의 아랫사람) · 하수인 · 표적(문파의 맨 윗자리) · 제보자(그보다 더 아래 동문) | 위와 같다 |
| 봉작 시기 | 흑막(관의 자리에 앉은 이) · 하수인 · 표적(봉호를 받은 이) · 제보자 | 위와 같다 |
셋은 흐름이 같고 누가 누구를 노리는지만 다르다.
하나씩 풀면 이렇다. 흑막이 하수인과 만나 담소를 나눈다. 화면에는 정말 담소로만 뜬다. 하수인이 표적이 사는 곳으로 떠나고, 표적을 암습한다. 여기서 연대기에 처음 줄이 서는데, 배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로 적힌다.
운이 좋으면 누군가 음모를 밝혀낸다. 밝혀지면 표적이 흑막에게 원한을 품고, 밝혀낸 사람이 흑막과 결판을 낸다. 끝내 밝혀지지 않으면 흑막은 영영 숨는다. 실제로 암습의 절반 넘게가 그렇게 끝났다.
흑막은 드러나기 전까지 데이터에도 없다. 암습 줄에는 이긴 사람과 진 사람만 적히고, 흑막은 음모가 밝혀지는 사건에만 이름이 나온다. 화면이 흑막 자리에 "누군가"를 세우는 것은 감추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모르기 때문이다.
밝혀지면 연대기의 음모 카드에서 빈 얼굴 자리에 얼굴이 들어서고, 점선이 실선이 되며, 하수인의 암습 줄에 "○○의 사주"가 되짚어 붙는다.


조건이 결말을 정하고 있었다
결말은 쓰지 않는다고 해 놓고, 처음에는 섭외 조건이 결말을 정하고 있었다.
- 하수인을 아무 무인이나 섭외했더니, 약한 하수인이 천하오절을 쳐서 암습이 28판 중 1판만 먹혔다. 그래서 하수인은 표적보다 내공 두 칸 아래까지로 걸었다.
- 음모를 밝혀낸 사람도 아무나 섭외했더니, 흑막과의 결판에서 14판 중 12판을 졌다. 밝혀낸 사람은 흑막보다 한 칸 아래까지로 걸었다.
둘 다 누가 이길지 단언할 수 없도록 조건을 구체화했다.
비무가 아니라 암살이다
암습이 처음에는 비무의 규칙을 그대로 탔다. 비무에서 죽을 확률은 내공에 반비례하니, 천하오절쯤 되면 1.4% 남짓이다. 그래서 240 세계년 동안 암습당한 표적이 한 번도 죽지 않았다.
음모로 난 싸움은 대련이 아니니 죽을 확률이 크게 높아야 한다. 이제 암습에 쓰러진 표적은 60%의 확률로 죽고, 죽음은 "암습에 쓰러져"로 기록된다. 100%가 아닌 것은 살아서 원한을 품고 돌아오는 표적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60 세계년 × 네 세계 | 전 | 후 |
|---|---|---|
| 쓰러진 표적이 죽은 판 | 0 | 16 |
| 흑막이 그 자리에 앉은 판(찬탈) | 0 | 4 |
음모는 드문 것이 자연스럽다. 지금은 현실 시간 기준으로 이틀 반에 한 번쯤 발생한다.
계속해서 늘어가는 사연
가장 최근에는 관아와 표국이 세계에 들어왔고, 그와 함께 사연도 일곱 편 늘었다.
| 사연 | 등장 인물 | 흐름 |
|---|---|---|
| 탐관오리 | 수령 · 백성 · 협객 | 수령이 백성과 시비 → 백성이 원한을 품는다 → 협객이 수령과 시비 → 관군과 협객의 충돌 → (진 쪽이 관원이면) 파직 → 진 쪽이 떠난다 |
| 관병의 횡포 | 관병 · 주민 · 협객 · 무관 | 관병이 주민과 시비 → 주민이 다친다 → 협객이 관병과 비무 → 협객이 관군을 끌고 온 무관과 충돌 → 진 쪽이 떠난다 |
| 추포 | 무관 · 원한을 품고 떠도는 무인 | 시비 → 비무 → 진 쪽이 떠난다 |
| 도적 토벌 | 도적 · 피해자 · 무관 | 도적이 피해자와 시비 → 피해자가 다친다 → 무관이 도적과 비무 → 진 쪽이 떠난다 |
| 봉작 시기 | 흑막(관원) · 하수인 · 표적(봉호를 받은 이) · 제보자 | 앞 절의 음모와 같은 흐름 — 암습 → 발각 → 원한 → 결판 |
| 실표의 진상 | 표두 · 내통한 표사 | (표물을 잃으면) 발각 → 원한 → 비무 → 진 쪽이 떠난다 |
| 표행길의 인연 | 표행에 나선 이 · 먼 고을에서 만난 이성 | (표물을 넘긴 날) 만남 → 교류 → 연모 → 밀회 → 결속 |
탐관오리는 협객이 언제나 이기지 않는다. 관군과 협객의 충돌은 이긴 쪽이 남고 진 쪽이 떠나서, 협객이 지면 쫓겨나는 것은 협객이고 탐관은 남는다. 결말을 쓰지 않는다는 원칙이 여기서도 같다.
봉작 시기는 앞 절에서 본 음모와 같은 틀이다. 관원이 봉호를 받은 이를 시기해 뒤에서 일을 꾸민다.
실표의 진상은 조건으로 섭외하지 않고 세계가 배역을 정해 발생시킨다. 녹림이 표사 하나를 매수하면 그 표행에 내통자가 생긴다. 그 표행이 표물을 잃으면 그 표두와 그 내통자로 사연이 걸린다. 조건으로 뽑으면 내통하지 않은 표사를 내통자로 지어내게 되기 때문이다.
요약 세 줄
- 사건이 맥락 없이 나서 로그가 무의미해 보였다. 그래서 사건 위에 틀을 얹었다. 시스템이 배역을 섭외하고, 있는 사건을 차례로 부르고, 결말은 쓰지 않는다.
- 첫 대본은 무협지에서 흔히 보던 플롯 열한 편이었다. 대본보다 섭외에서 먼저 문제가 드러났고, 원한과 명성처럼 세계에 없던 조건이 그것이었다.
- 흑막은 누구를 노렸나로 갈린다. 드러나기 전까지 데이터에도 없고, 절반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암습은 사망이 드물게 발생하는 비무가 아니라 생사를 건 암살로 분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