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nius작업과 취향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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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DING NOTES · 01

설명서로 시작해 전시장이 된 결혼식

전달되지 못한 청첩장, 요구사항을 모아 준비한 프로포즈, 두 사람의 시간을 전시장으로 옮긴 결혼식에 관한 기록.

결혼식은 사적인 일을 사람들 앞에 꺼내놓는 행사다. 나는 원래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를 결혼식에 초대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을 우리 이야기 안에 등장시킨 셈이 된다. 그렇다면 그 자리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짧지만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청첩장은 설명서가 되었고, 프로포즈는 요구사항을 반영한 작은 프로젝트가 되었으며, 결혼식장은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을 펼쳐놓은 전시장이 되었다.

01

전달되지 못한
청첩장

내가 직접 만든 청첩장은 가까운 사람들과 회사 동료들에게만 전달됐다. 결혼식이 임박한 뒤에는 어머니가 큰 꽃이 그려진 템플릿 청첩장을 급히 따로 발주했고, 친척을 포함한 하객의 절반 이상은 그 청첩장을 받았다. 정작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청첩장은 하객 대부분에게 도착하지 못한 셈이다.

나와 아내는 1999년, PC통신의 천문 관련 소모임에서 처음 알게 됐다. 약 5년 동안 친구로 지내다가 2004년 2월부터 연인이 되었고, 동물원에 가고 책을 읽고 영화와 드라마를 보며 11년을 만난 끝에 2014년 11월 1일 결혼식을 올렸다. 그 시간을 ‘오래 연애했다’는 한 문장으로 줄이는 대신, 우리의 생활 패턴에서 셀 수 있는 것들을 골라 청첩장에 넣었다.

청첩장에는 함께한 데이트 5,094시간, 같이 마신 커피 1,578잔, 동물원에서 만난 동물 친구 14,814마리가 적혀 있다. 함께 걸은 거리는 계산값으로 4,268km였다. 청첩장을 건넬 때마다 “대체 이걸 어떻게 계산했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계산의 출발점은 카드 결제 내역이었다. 당시 내게는 차가 없어서 거의 언제나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데이트 코스도 비교적 일정했다. 만난 곳과 약속 장소, 헤어진 곳을 카드와 교통카드가 기억하고 있었다. 이동 거리는 그 동선을 바탕으로 계산했고, 데이트 시간은 교통카드의 승하차 시각을 기준으로 잡았다. 커피 역시 카드 결제 기록에서 횟수를 추려 환산했다.

동물 친구의 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셌다. 우리가 방문한 해에 각 동물원이 보유하고 있던 동물 수를 찾아 모두 더했다. 실제로 한 마리씩 눈을 맞췄다는 뜻은 아니지만, 동물원 나들이를 좋아했던 두 사람의 시간을 표현하기에는 잘 어울리는 단위였다.

직접 만든 청첩장이름은 점으로 표시하고 전화번호는 제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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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부터 서체와 배색까지 직접 작업한 청첩장 결과물
청첩장 주요 내용 읽기

청첩장은 함께한 시간을 숫자와 지도로 담았다. 결혼식은 2014년 11월 1일에 열렸다.

함께한 날
3,907일
데이트 시간
5,094시간
함께 마신 커피
1,578잔
동물 친구
14,814마리

양끝의 신부·신랑 표지를 펼치면 내지가 나타난다. 기본 지도 위에는 90% 크기의 지도 별지가 셀로판테이프로 붙어 있다.

모시는 글

행복한 삶을 함께 여행할 좋은 동행을 만났습니다.

가족이 되어 걷게 될 새로운 길 위에서도 지금처럼, 절친한 친구이자 다정한 연인으로 도란도란 정답게 손잡고 한 걸음씩 찬찬히 나아가겠습니다.

소중한 다짐을 나누는 순간을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고 싶습니다.

신랑 · 신부

※ 화환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그 숫자들은 관계를 증명하기 위한 통계가 아니었다. 막연한 추억을 우리에게 익숙한 자료로 번역한 결과에 가까웠다. 청첩장은 결혼식의 장소와 시간을 알리는 종이인 동시에,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함께 살아왔는지를 압축한 작은 가이드북이었다.

02

이정표가 된
프로포즈

2000년대 초반에는 남녀 커플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가 유난히 많았다. 《Friends》, 《Coupling》, 《How I Met Your Mother》를 즐겨 봤고, 다른 영화와 드라마까지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프로포즈에 관해 자주 이야기했다.

시간은 요구사항을 구체적으로 만들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프로포즈는 부담스럽다. 그래도 약간의 놀라움은 있었으면 좋겠다. 반지를 건넬 때 무릎을 꿇는 자세는 클래식이라 좋다. 나는 결혼을 이야기하기 석 달 전부터 대화 속에 흩어진 조건들을 하나씩 모았다.

그다음에는 장소를 찾았다. 평범한 데이트 중 갑자기 선언하려면 우리에게 익숙한 곳이어야 했다. 청파동과 뚝섬 주변을 중심으로 후보지를 고르고, 휴가를 내서 직접 찾아가 시간대별 풍경과 사람의 흐름을 살폈다. 그리고 데이트 중에도 주변의 유동량은 기록했다.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근처 공터와 효창공원 의열사 앞도 후보에 올랐지만, 최종 장소는 주변에 카페와 식당이 많고 데이트 동선에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는 자벌레 건물 아래 공터가 되었다.

소품은 그동안 다녀온 곳의 입장권으로 만들었다. 티켓의 첫 글자를 이어 읽으면 ‘MARRY ME’가 되도록 앨범을 구성하고, 페이지마다 그날의 이야기를 정신없이 적었다. 앨범을 건넨 뒤 숨은 의미를 찾아보라고 하고, 그 순간 세공사로 일하던 친구에게 구한, 가격에 비해 제법 커 보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낼 계획이었다.

날짜는 외출 자제령이 예고되어 유동 인구가 적을 것으로 기대한 2013년 11월 23일, 시간은 오후 6시 30분으로 정했다. 스태프는 사진 촬영을 업으로 하던 친구 한 명뿐이었다. 친구는 멀리서 미리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계획은 요청사항을 거의 빠짐없이 충족했다. 익숙한 데이트 장소였고, 지나가는 사람은 드물었으며, 아내에게는 서프라이즈였다. 나는 조명이 닿는 강변에서 무릎을 꿇었고, 친구는 멀리서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다.

프로포즈 맨트의 일부

지금 이 순간이 너에게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밤하늘의 큰곰자리처럼 변함없이 가슴 설레게 하는 이정표가 되기를 바랄게.

03

두 시간 자고 시작한
세 시간의 결혼식

결혼식을 어떻게 치를지에 대해서도 막연한 생각은 있었다. 허례허식처럼 느껴지는 순서는 생략하고 싶었다. 하지만 준비를 시작하고 보니 현대의 결혼식은 이미 충분히 압축된 행사였다. 무작정 덜어내기보다, 찾아온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고 좋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게 하는 쪽으로 목표를 바꿨다.

준비할 일은 두 사람이 각자 나누어 맡았다. 청첩장은 내 담당이었고, 아내가 담당한 핵심은 예식을 ‘광고 촬영 현장’처럼 구성하는 아이디어였다. 당시 외국계 회사에서 브랜드 마케팅을 하며 광고 촬영 현장에 익숙했던 아내는 하객과 신랑 신부의 관계를 ‘촬영 현장의 스태프와 배우’에 대입했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먼 무대를 바라보는 대신, 짧고 꺾인 웨딩 로드 주위에 자리를 놓고 결혼식의 장면 속으로 들어오게 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하객들이 웨딩 로드 주위에 서서 축하하는 작은 미술 전시관 결혼식 스케치
도면과 실제 예식 사진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결혼식 풍경. 짧은 웨딩 로드 주위에서 하객들이 함께 축하했다.

주례사는 두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직접 하객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폐백도 별도의 공간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고 예식 순서 안에 넣어 모두가 함께 보고 축하할 수 있게 했다. 다만 주례사를 대신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못해, 입장하는 동안 머리를 굴려 문장을 만들며 진땀을 뺐다. 그때의 다급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객에게 전한 감사의 말 가운데 마무리 인사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오늘 날씨가 너무 춥지는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행복한 감정은 사람의 체온도 높여 준다고 하는데요. 11년 동안 쌓아 온 저희의 추억이 오늘 귀한 시간을 내어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행복과 사랑으로 전해져, 체온을 0.1도라도 올릴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오늘 함께해 주신 모든 분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을 위해 솜사탕 기계를 준비했다. 혼자 온 사람도 심심하지 않도록 전시장 곳곳에는 둘이 함께 다닌 공연의 티켓, 주고받은 선물처럼 두 사람의 취향이 담긴 물건을 놓았다. 빈 벽은 웨딩 스냅으로 채웠고, 테이블 위에는 준비하는 틈틈이 종이로 접은 동물 친구들을 올렸다. 종이 동물은 식탁 장식이자 하객이 가져갈 수 있는 작은 선물이었다. 공식적인 답례품은 청첩장의 이미지들을 섞어 만든 에코백이었다.

두 사람의 기록을 벽에 배치한 전시 공간
함께한 기록을 채운 벽
상자 위에 놓인 인형과 그림 등 두 사람의 소장품
주고받은 물건과 취향
테이블 위 식물 장식과 흰색 종이 동물
장식이자 선물이었던 종이 동물
웨딩 스냅으로 채운 흰 벽과 테이블
빈 벽을 채운 웨딩 스냅

장소는 강남의 작은 미술 전시관이었다. 전문 예식장이 아니어서 정해진 순서대로 손님을 내보내거나 다음 예식을 위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오후 1시에 시작한 결혼식은 4시까지 이어졌다. 식사를 하고, 손님들과 대화하고, 전시물을 함께 보며 시간을 보냈다. 준비한 200인분의 음식은 모두 바닥났고, 솜사탕 기계는 쉴 새 없이 돌아가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결혼식 날만큼은 좋은 컨디션이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달랐다. 업무와 결혼 준비가 겹친 데다 2차 CBT 데이터 마감까지 이어져 자정이 넘어서야 퇴근했다. 집에 돌아와 새벽 3시까지 혼인 서약서를 썼고, 두 시간쯤 눈을 붙인 뒤 다시 일어나 결혼식을 치렀다.

예식이 끝난 뒤 신혼여행을 떠났지만 긴장이 풀린 두 사람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벤치에서 잠이 들었다. 몇 달 동안 요구사항을 모으고, 숫자를 계산하고, 종이를 접고, 공간을 채우며 만든 결혼식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청첩장은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았던 생각은 프로포즈와 결혼식장 곳곳으로 이어졌다. 우리의 시간을 관습적인 문장으로 설명하기보다 숫자와 물건, 동선과 장면으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돌아보면 우리가 만든 것은 특별한 형식의 결혼식이라기보다, 오래 함께 보낸 시간을 손님들이 잠시 걸어볼 수 있게 만든 하나의 전시였는지도 모르겠다.

신랑의 혼인 서약서

우리가 함께 한 3907일의 어제 위에서
오늘 나 는 그대 의 남편이 되어 우리의 첫 내일을 맞이하려 합니다.

그대를 지금처럼 앞으로도 존중하고 존경하겠습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누구의 아내, 누구의 대리자가 아닌 으로 결핍이 있는 반쪽이 아닌 온전한 성인으로서 존경하고 존중하겠습니다.

그대에게 변함없이 다정한 남자 친구가 되겠습니다.
새로운 취미를 함께 즐기고 그대의 질문 하나하나에 언제나 최선의 대답을 궁리하는 다정한 남자친구가 되겠습니다.

그대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남편이 되겠습니다.
함께 걸었던 4268km보다 길고 막연한 앞으로의 여정에 함께 있는 것 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남편이 될 것을 여기 계신 모든 증인들 앞에서 엄숙히 서약합니다.